본문 바로가기

일본의 역사 | 日本の歴史 | にほんのれきし

⚔️ “도호쿠를 정복하라” – 8세기 나라 시대 에미시 정벌 이야기

728x90

📜 나라시대의 야망 – ‘지도 위의 공백’을 채우다

8세기 일본, 나라시대.
중앙 정부는 율령국가를 완성하고, 불교, 문자, 관료제를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도 위엔 여전히 공백이 있었어요. 바로 혼슈 북부, 지금의 도호쿠(東北) 지방입니다.

그곳엔 복속하지 않은 사람들, ‘에미시(蝦夷)’가 살고 있었죠.


👤 에미시란 누구인가요?

‘에미시’는 단순한 부족이 아니었어요.

구분 내용
🧬 인종 일본 본토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 (야요이 후손)
🏞️ 지역 혼슈 북동부 (지금의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등)
🌱 문화 중앙과는 다른 토착신앙, 씨족 중심의 생활
🛡️ 정치·군사력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전술, 지역 지도자 존재

중앙에서 보면 '야마토 문화권' 바깥,
즉,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처럼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자율성과 강한 정체성을 가진 지역 공동체였습니다.

일본 도호쿠 지방 및 홋카이도 지역에 있는 에미시(emishi) 지역 (출처: 위키피디아, 클릭하면 원본 이동)

에미시는 ‘혼슈 내의 동일한 계통’이었더라도, 정치 체제와 생활 양식 면에서는 야마토 정권 아래의 백성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구분 야마토 정권 에미시
정치 체제 천황 중심 율령 체제 독자적 족장 사회
문화 한자 사용, 불교 수용 토착 신앙, 구술 전통
생활 방식 농경 중심, 정착 생활 일부는 유목·수렵적 요소 포함
군사 체계 중앙정부의 관군 기마 중심의 전투 방식, 독립 군사력

➡️ 이런 차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에미시를 ‘야만(野蛮)’으로 간주하고 복속의 대상으로 삼았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적 독자성과 정치적 저항성이 강했던 자율 공동체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에미시’는 민족? 아니면 정치적 개념?

‘에미시(蝦夷)’라는 말은 고정된 민족 이름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복속하지 않은 집단을 뭉뚱그려 부르는 정치적 용어였습니다.

비슷한 예로, 중국이 주변 민족을 ‘오랑캐(胡, 蛮)’라고 부른 것과 같아요.

🕰️ 그래서 시대가 흐르면서 '에미시'의 대상도 바뀝니다!

시대 '에미시'의 대상
나라시대 도호쿠 지역 토착민
헤이안~중세 더 북쪽의 주민들
에도시대 이후 홋카이도의 ‘에조(蝦夷)’, 즉 아이누(Ainu)족과 연결

❓에미시 vs. 에조, 뭐가 달라요?

항목 에미시(蝦夷) 에조(蝦夷)
📍 시대 나라~헤이안 시대 중세~근세 이후
📌 지역 혼슈 동북부 (도호쿠) 홋카이도 및 북방지역
👥 집단 혼슈 토착 공동체 후에 ‘아이누’로 불린 북방 민족
🧭 개념 정치적 용어 (복속 X) 민족·문화적 용어로 구체화됨

✔️ 한자로는 둘 다 ‘蝦夷’(에미시/에조)라고 쓰지만, 시대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어요!


🛡️ 나라시대, 에미시 정벌 시작!

중앙 정부는 도호쿠를 ‘영토화’하려 했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아니라, ‘국가의 지도’를 완성하는 작업이었죠.

  1. 정예 군대 편성
  2. 지방 행정단위 설치 – 무쓰노쿠니(陸奥国) 등
  3. 교통 정비 – 동쪽으로 향하는 길 '아즈마노미치(東道)' 개척

⚠️ 그러나 에미시는 쉽게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게릴라 전술과 지형의 이점을 살려 저항하며, 전투가 길어졌어요.


나라시대(710~794)의 일본이 도호쿠의 에미시(蝦夷)를 정벌하려 한 이유는 단순한 ‘전쟁’이나 ‘영토욕’이 아니라, 율령국가로서 완성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행정적 전략이었습니다.

다음의 4가지 키워드로 쉽게 정리해볼 수 있어요:

첫째, 율령국가 완성 = 모든 지역을 통치하겠다!

나라시대의 일본은 중앙집권적 율령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어요.
즉, 법과 제도에 따라 전국을 일률적으로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죠.

하지만…
📍 도호쿠 지방은 여전히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었어요.
에미시는 세금도 안 내고, 율령도 안 따르며, 고유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죠.

👉 이건 중앙 정부 입장에서는 ‘국가 바깥’에 있는 존재, 즉 복속시켜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둘째, 영토 통합 = 지도 위의 공백 제거

당시 일본은 **중국(당나라)**처럼
국가라면, 지도 위의 모든 땅이 중앙 정부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 도호쿠처럼 중앙의 법과 질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은 곧 ‘지도 위의 공백’이자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 ‘정벌’은 곧 ‘국가의 테두리 그리기’ 작업이었던 거죠.

셋째, 군사력 과시 + 외부세력 차단

에미시는 단순한 부족이 아니라,
🏇 기마 전술, 🏹 활 솜씨, 👥 독립된 지도자를 가진 강력한 집단이었어요.

👉 도호쿠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면
중앙 정부 입장에선 잠재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죠.

또한, 북방에 외부 세력이 접근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변경 지역을 국가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서도 통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넷째, 개발과 교통로 확보

정벌 후에는 도로와 성(城)을 건설하고,
행정 구역(예: 무쓰노쿠니 陸奥国)으로 재편했어요.

✔️ 이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 국가 기반시설 확충이자
👉 경제·행정적 연결망 확보를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 “아즈마노미치(東道)” 같은 길을 닦고,
📍 관리들을 파견하여 실질적인 영토화 작업을 진행했죠.

✅ 요약하면

나라시대 일본이 도호쿠의 에미시를 정벌한 이유는,
단지 영토를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율령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지도 위의 공백을 없애며, 국가의 경계를 확립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가의 탄생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