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틀을 바꾸는 개혁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이름 아래 시작된 일본의 정치개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50년 넘는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은 다이카개신부터 다이호율령 제정(701년)까지,
일본이 씨족 중심의 고대 국가에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 645년, 다이카개신의 시작
645년,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이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궁중 회의 중에 제거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백 년 권세를 누리던 소가씨는 몰락했고,
곧이어 일본 최초의 연호 ‘다이카(大化)’가 제정됩니다.
소가씨를 무너뜨린 대격변,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은 왜 일어났을까?
한 나라의 권력은 누가 쥐고 있는가?오늘날엔 당연히 국왕이나 대통령이라 말하겠지만, 고대 일본은 달랐습니다. 천황이 있어도 실제 권력을 쥔 사람은 따로 있었죠.6세기 말~7세기 초 일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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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改新)’이라는 이름처럼,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향한 개혁이 공식적으로 출발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방침'만 정해졌을 뿐,
실제로 국가 구조가 바뀌는 데는 대략 50년 이상 더 걸립니다.
호족(유력 씨족 세력)들의 힘은 여전히 강했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663년, 백촌강의 패배와 내정 전환
다이카개신의 주역이던 나카노오에 황자는
663년, 한반도에서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과 함께 치른 백촌강 전투에서
당나라-신라 연합군에 대패하게 되죠.
우리나라에서는 '백강전투'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백촌강 전투( 白村江の戦い, はくそんこうのたたかい , 하쿠손코오노 타타카이)'라고 합니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 하구 쪽을 의미합니다. 왜국(일본)과 백제가 한 편이 되고, 당나라와 신라가 한 편이 되어 전투를 벌였고, 당과 신라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 큰 충격을 줍니다.
외교적 야망보다는 내치(국내 정치 정비)에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계기였고,
이후 개혁은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 668년, 덴지천황의 즉위 – 개혁의 제도화
645년 개혁을 주도했던 나카노오에 황자는
약 20년 후인 668년, 드디어 텐지 천황(天智天皇, 텐지 텐노)으로 즉위합니다.
그는 수도(오미노미야, 오늘날 시가현 오쓰시)를 새롭게 정비하고,
본격적인 제도 개혁에 착수합니다.
- '영(令)'과 '호적(戸籍)'을 제정해
백성을 국가가 직접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 조세와 군역을 효율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중앙정부 행정 시스템이 강화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 호족 세력은 견고했고,
개혁을 완성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 1. ‘영(令)’이란 무엇인가요?
‘영(令)’은 법령, 즉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행정 규칙을 말합니다.
특히 관직 체계, 세금 제도, 토지 제도, 백성의 의무 등을 정리한 문서예요.
- 예를 들어, 누가 관리가 될 수 있는가?
- 백성은 몇 살부터 노동해야 하나?
- 땅은 어떻게 나눠줄까?
→ 이런 내용들이 ‘영’에 담겨 있습니다.
✅ 왜 중요할까?
‘영’의 제정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백성을 통치하는 기준을 문서화한 것이에요.
→ 즉, "이제부터는 천황의 법 아래 모두가 움직여야 한다!"는
국가 중심의 통치 질서가 등장한 것입니다.
👥 2. ‘호적(戸籍)’이란 무엇인가요?
‘호적(戸籍)’은 백성들의 이름, 나이, 가족 관계, 사는 곳을 적은 인구 명부입니다.
- 언제 태어났는지
- 어디에 사는지
- 누구와 가족인지
→ 이 모든 정보를 기록한 것이 바로 호적입니다.
당시 일본은 6년마다 호적을 새로 작성했고,
그 호적을 바탕으로 세금 부과, 노동 동원, 군사 징집 등을 했어요.
🏛️ 다이카개신에서 영과 호적의 의미는?
다이카개신의 목표는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로만 ‘개혁’을 외친다고 바뀌지 않죠.
그 개혁을 제도적으로 실현한 것이 바로
- 영: 국가 운영의 규칙을 정하고
- 호적: 백성을 관리하고 동원할 수 있게 한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백성은 천황의 백성이다’라는 원칙을 가능하게 했고,
지방 호족들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천황이 국가와 백성을 직접 통치하는 시대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었어요.
🔥 672년, 임신의 난 – 왕위 계승 전쟁 속의 기회
텐지 천황 사후,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납니다.
이를 임신의 난(壬申の乱, じんしんのらん, 진신노 란)이라 부릅니다.
- 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 vs 오토모 황자(大友皇子)
- 전투 끝에 오아마 황자가 승리하고,
673년 텐무 천황(天武天皇, 텐무 텐노오)으로 즉위합니다.
이 내전은 단순한 왕위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토모 황자 편에 섰던 유력 호족들이 몰락하면서,
천황 중심의 정치 질서를 구축할 결정적 기회가 열립니다.
📜 701년, 다이호율령 제정 – 중앙집권국가의 완성
그리고 마침내, 약 55년 후인 701년(다이호 원년),
다이호율령(大宝律令, 타이호 리츠료)이 완성됩니다.
- ‘율’은 형법(처벌 기준), ‘령’은 행정법(관리 기준)을 뜻하며
- 이것은 중앙집권 체제를 법적으로 완성한 국가 운영 지침서였습니다.
- 당나라의 제도를 본격 도입해
관료제, 관직 체계, 토지제도, 호적제도 등
국가 운영의 틀이 정비됩니다.
즉, 다이카개신이 제시했던 이상이
제도와 법으로 구체화된 시점이 바로 다이호율령의 제정이었습니다.
🧭 정리하며 – 개혁은 한순간이 아니라 흐름이다
다이카개신은 단순한 쿠데타나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구조의 전환점이었고,
이 개혁이 실제로 국가를 바꾸는 데는 무려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 645년, 소가씨를 무너뜨리고 개혁의 방향을 선언
- 668년, 덴지 천황이 제도화를 시도
- 672년, 임신의 난을 계기로 호족이 약화
- 701년, 다이호율령으로 천황 중심 국가 체제 완성
이 흐름을 통해 일본은
씨족 사회에서 벗어나 천황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이후 **나라 시대(奈良時代),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정치질서를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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