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처럼 멋진 수도를 만들자!”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 나라시대(奈良時代, ならじだい, 나라 지다)는 일본이 ‘국가’라는 형태를 본격적으로 갖춰나간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단순히 수도가 생긴 게 아니라, 일본 전역에 도로, 세금, 화폐, 신분제, 외교 전략까지 깔리던 시기였죠. 오늘은 나라시대의 특징을 쉽고 재밌게 풀어보겠습니다!
📌 ‘나라(奈良)’의 어원과 의미
✅ 유력한 설: 평평한 땅, 평지(平地)
- 고대 일본어에서 ‘나라’는 평탄한 곳, 고르게 된 땅을 의미했다고 여겨집니다.
- 이는 일본어의 고어 “naru (ならす, 평평하게 하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로,
즉 "나라"는 개간된 평지나 넓은 들판을 뜻했다고 보는 거죠. - 지금의 나라 지역도 실제로 분지 지형이라 비교적 평평한 지역이었어요.
✅ 한자 '奈良'는 의미보다 음을 따온 표기 (음차)
- '奈良'라는 한자는 본래 중국에서 왔지만, 여기서의 '奈'나 '良'은 특별한 의미보다는 일본 고유 지명인 '나라'의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붙인 표의적 한자(當て字, 아테지)입니다.
- 다시 말해, ‘나라’라는 발음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奈良'라는 한자를 나중에 붙였다는 것이죠.
📌 한자 '奈(내)'와 '良(량)' 자체의 의미는?
- 奈: 본래는 감람나무(올리브 나무)를 뜻하거나 ‘어찌 ~하랴’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함.
- 良: ‘좋다’, ‘훌륭하다’는 의미.
- 하지만 이 한자들은 ‘나라(奈良)’라는 지명에 딱히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고, 단지 음차적인 역할이 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정리하면:
- ‘나라(奈良)’는 본래 ‘평평한 땅’, ‘고른 들판’을 뜻하는 고어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 ‘奈良’라는 한자는 후에 소리를 따서 붙인 것으로, 문자 자체의 뜻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 나라 시대는 그 나라 지역, 즉 헤이조쿄(평성경)가 수도였던 시기이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 1. 수도는 ‘카피 장안’?
710년, 일본은 수도를 나라(奈良)에 건설합니다. 공식 명칭은 헤이조쿄(平城京).
이 수도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델로 삼았어요.
- 직선 도로로 정비된 도시 구조
-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전
- 동서에 시장
- 도로망, 역참제도(말과 사람을 교체하는 휴게소) 완비
📌 요즘으로 치면 ‘국가 기반 인프라’를 깔아가던 거죠.
🏯 왜 헤이조쿄는 장안을 닮았을까?
1. 국가 체제 수입 = 제국의 흉내
헤이조쿄가 조성된 시기(710년)는 일본이 율령 체제를 막 정비하고 중앙집권 국가를 꿈꾸던 때였습니다.
이때 일본이 롤모델로 삼은 나라가 바로 당나라(唐)예요.
당나라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달된 법치 국가이자 제국이었고,
그 수도 장안은 질서 있는 도시 설계 + 황제를 중심으로 한 통치 공간의 상징이었습니다.
📌 → 일본도 ‘우리도 제국이다’라는 상징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장안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거죠.
2. 도시의 구조 = 권위와 질서의 상징
장안과 헤이조쿄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 직선 도로망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공간)
- 북쪽 중앙에 천자/천황의 궁전
- 동시(東市), 서시(西市) 등 공식 시장 설치
- 궁궐 중심의 방형 도시 구조 (바둑판 모양)
➡️ 이런 구조 자체가 "천자는 북쪽에 있어야 한다"는 중국 전통 정치이념을 반영한 것이에요.
천황의 신성함과 중앙 권력의 질서를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었죠.
3. 문화·사상·종교의 수입 통로
당시 일본은 단지 도시 구조뿐 아니라,
- 불교,
- 율령법,
- 한자 행정문서 체계,
- 복식과 의례,
- 도자기, 회화, 음악 등 예술 전반을 당나라에서 수입했습니다.
📌 헤이조쿄는 이런 모든 ‘문명 요소’를 받아들이는 중심지, 즉 문화 허브 역할을 하게 된 거죠.
4. 국제 감각과 권위 과시
당시 일본은 중국뿐 아니라 신라, 발해 등 주변국과 외교를 활발히 했는데,
수도를 장안처럼 꾸미면 이렇게 말하는 셈이에요:
“우리도 제국이다. 우리도 황제가 있다.”
➡️ ‘외교 무대에서의 자기 과시’도 큰 동기였어요.
중화 질서 속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방식이었죠.
✍️ 정리하자면
헤이조쿄가 장안을 모델로 삼은 이유는 단지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로 통치하는 국가”를 시각적으로,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상징적 선언이었습니다.
이 도시를 통해 일본은 정치제도뿐 아니라 문화, 종교, 국제 이미지까지 모두 재설계하려고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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